키보드와 삼국사기
그것은 진정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어떤 것의 이 악장만 같다. 어째서, 어째서 삼국사기의 저자는, 신라를 가리켜, 신라라고 했던 것일까? 그러면 전라도는 신라라는 명칭 작업 이전에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신라라는 삼국사기의 거대한 네이밍에 걸쳐, 나중에 이름 붙여진 것일까?
어차피 세상은 생산력과 생산성의 문제에 걸쳐, 소진되고, 관계는 늘 누구에게나 추궁이 되는 것일 것이다. 그 무엇도. 혹은 어느 누구라도.
신라본기에는 단 하나의 기독교적 용어가 나오지 않는데, 어째서 신라가 기독교와 관련이 있다는 것인가? 불국사와, 각종 용궁사, 그런 절들이 많은데, 도리어 고신대가 하나 있다고, 경상도 신라 영토를 기독교로 보는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대구. 박정희. 그렇게 생각하다 보면, 영원히 기독교와는 상관이 없지 않겠는가?
그보다도 먼저, 어째서 조선은 삼국사기의 나라이겠는가? 그것의 증거가 단 하나라도 있는 것인가? 연산군을 보면, 그의 악행, 사도세자, 그의 악행, 그런 것들을 보면, 겨우 삼국사기의 문턱에라도 닿은 느낌이 있다. 우리가 삼국사기와 조선을 하나로 여길 수 있는 것은, 우리나라가 어디 도망할 곳이 없는 한반도이기 때문이다. 나는 한반도에서 글을 쓴다. 처음에는 누구나 쓸 수 있는 한반도, 그런 한글 쓰기 같았으나, 조금은 유식한 데가 있는, 하지만 너무 자유로운, 그런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한반도의 마지막 골목에 이르러, 수많은 곽현수, 김한민, 김현수, 이름이 생각나지 않은데, 한 명의 학생이 있는 종말론적, 그런 콩트, 그런 것의 과장에 걸쳐, 정말 나도 드디어 그런 비슷한 위치에 다다른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여수 돌산 어딘가에는, 향일암, 원효대사가 도를 닦았다는 신비로운 평평한 돌이 있는데, 거기다 돈을 던지지 말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돈을 던지면, 적어도 내게 뭔가를 도움을 주는 것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교육 제도 안에서는, 모든 것이 일상이나, 교육 제도 바깥에서는, 원효대사마저 기적과 같은 것이다. 말로만 듣고, 대충 알고만 있고, 그런 것은 대게가 비본질적인 것이기 때문에, 그가 좌선하였다는 돌을 보고는, 어떻게든지 거기에 닿고 싶어서 그런 것일 수 있는 것이다. 그 자연. 바다. 돌. 죽음의 어떤 마지막, 느낌. 해가 뜨는 곳. 거기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희미한 선인 것이다. 그런 선들을 모아서, 잘 정제하면,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몇 번의 이 악장 같은 것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오뎅도 그렇다. 민중 불교를
그 기억을 너무 업수이 여겨서는 곤란한 것이다......
조선이 삼국사기의 나라였다는 것은, 좀체 아무런 기록이 없다.
사마천의 사기가 유방을, 후지산을 세상에 내놓은 것은, 삼국사기를 잘 알아서 한 행동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이천 년 넘게, 그것의 단 하나의 코드를 우리는 짚지 못하고, 살고, 죽는 것인 것이다.
그렇게 보면, 임진왜란은, 사마천의 사기가, 우리도 잘 모르는 삼국사기의 조선을, 일종의 비교문학적으로다가 침략해 들어온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래서 그들이 죽었다고 도저히 여길 수가 없는데, 진주성의 사람들도 그렇고, 죽었다고 여기면, 다시금 이 악장을 만들어낼 수 있는 선들이 세상에, 도처에, 가득한 것이 되는 것이다.
천만 가지 재료를 내놓았으나, 단 하나도 우리는 작곡하지 못하는 것일 수 있다. 전도연이 한석규를 만나려고, 영화 마지막에, 그렇게 배회하던 시간도, 모습도, 지나고 나면 짧은 것 같으나, 다시 보게 되면 한없이 길고, 몇 번을 죽고, 몇 번을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시간임을 깨달을 수가 있다.
정태성 선생의 강의도 그렇다. 몇 명의 학생과, 참관 교수가 있지만, 무슨 말을 어떻게,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을 다시 말하려고 하면, 원효대사의 선과 더불어, 합성의 어떤 효과가 생기는지, 갑자기 분위기가 급격히 침울해지고, 막연해지고, 다시금 장녹수의 집안의 재산이 폭증하는 것 같고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그와 같은 과거지사에 관한 접근 논리적인, 그런 구조주의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연산군이, 그의 악행이, 사도 세자가, 그의 악행이, 겨우 삼국사기의 문턱을 닿을 수 있었던 것은, 이방원이, 그나마 임금의 시기를 거친 것이, 그렇게 슬플 수 없는 것이다. 권혁수의 그 한 명 학생에 관한 콩트가, 정태성 선생의 강의와 그렇게 겹치는 것이 있다. 우리는 다시 넓디넓은 한반도에 빠지며, 누구도 그것을 두고 왈가왈부할 수가 없다. 그냥 이미지즘이 있는 것이다. 내가 이미지라는 여배우를 좋아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뒤늦게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나, 그는 너무 늦게 학교에 지각한 것은 아닌 것이다. 사람들은 공승연도 너무 예쁘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새로운 음악 같다. 약간은 소피아 로렌을 닮았고, 로마의 휴일 여배우를 닮았다. 그냥 하는 소리이다. 아무런 대표작이 없이, 이것은 흡사 시크릿 가든 원스 인어 레드 문 비슷하다. 도대체 어딜 봐서, 조선이 삼국사기의 나라인가?
아직 우리는 사기의 진면목을 보지 못했다.
그렇다고 내가 불성실했던 것도 아니다. 내게 기회가 오면, 특히 만루 찬스에서, 타율이 한 구할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언젠가는 딴 데를 보고 있는데, 누군가 불러서, 투수가 공을 던지고, 주심이 스트라이크 콜을 했었다.
삼국사기에도 가지 못하고, 다만 소수림왕에게도 가지 못하고, 미천왕, 대무신왕, 아신왕, 그 모든 왕에게도 가지 못하고,
우리들의 역사학은, 광주역전 앞에서 누군가를 만나기로 한 오후의 햇빛 같은 것이었던 것이다.
내가 꾸준히 기회를 살렸으니,
임금이 비록 붕어를 하였으나
공기 중에도 숨을 쉬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옛말에, 기회가 생기면, 기아 타이거즈, 반드시 한반도의 글쓰기를 행해야 한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의 성공 여부는, 너무 따질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하는 것과 하지 않은 것은, 신양파크 호텔, 그것의 지차인 것이다.
우리는 부분으로 향하는 것일까? 아니면
관통하여 우뚝 서는 것일까?
정태성 선생이 무슨 강의를 하면, 조선시대, 매 회, 우리는 늘 부분으로 고꾸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날 학파처럼, 일종의 프래그머티즘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다시금, 찍으면 찍히는 우리들의 단순한 의식의 계곡에서
피아노 협주곡과
고린도 전서가 우리의 어깨를 붙들고 올라가는 느낌을 받는다......
*
우리가 사기를 배울 때는, 사대주의에 빠질 수 있었다. 그것은 다른 것을 배우지 않았다는 것이기도 하다. 삼국사기를 배운다는 것은, 그런 학습의 시간이, 죽고 싶은 마음 뿐일 때가 많다.
그래서 임진왜란은 다소 오차가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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