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민중문화이야기
나의 서울로: 무빙을 안 보고
by 마음대로다
2023. 9. 18.
나의 서울로: 무빙을 안 보고
우리는 매우 흥미로운 고대의 그림자를 발견할 수 있다. 프랑스의 무빙 제목이 인상적인 것이 있다. 두 사람이 페르세폴리스에서 살다가, 기도하다가, 먹다가, 우리가 나머지 건축물들을 다만 상상하지, 기둥만 아스파라거스처럼 남은 것을 보게 되니까, 한 사람이 그만 머리가 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역사를 너무 맹신한 것에도 문제가 있을 것이지만, 그와 같은 신비로운 초현실적인 자연적인 현상도 또한 매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 사람은 어째서 머리가 잘리지 않은 것일까? 이탈리아는 페르세폴리스처럼 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 것인가? 그래서 별다른 문건 문학, 예를 들면 문학 같은 것, 철학 같은 것, 그런 것이 없는 동유럽은 그것의 일종의 완충지역 같은 것인가? 영화 용의자에는, 그런 기가 막힌 장면이 나온다.
그러니 우리는 초자연적인 현상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뻔히 있는 서양의 구조물들이, 아름다운 자유 정신을 갖고, 근대 미학적인 정신을 갖고, 더불어 고대와 중세, 근대의 유산을 향유하는, 그레이트 익스펙테이션,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사람들이 그렇게 살지를 못하고, 다만 페르세폴리스 당하는 사람을 오늘도 찾는, 조용필의 하이에나처럼 오늘도 찾는, 그런 나머지 그런 것들이 매우 두려운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거미가 되거나, 반인반수가 되거나, 한인수, 아니면 안주 벌드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조가 아름다운 건물을 짓게 되면, 늘 칼을 가지고 다녔던 고대 노예제의 사람들은, 아름다운 실제 등신이나, 보다 큰 규모의 인물상들을 끊임없이 만들어야 했던 것이다. 여백의 미라는 것은 그들에게는 있을 수가 없다. 도대체 무슨 이유로 용의자 2는 나오지 못하고, 대충 도깨비로 빌어먹다가, 마침내 무빙으로 하나가 된 것일까? 마녀 원투가 살짝 있고.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나의 서울로.
사람들은 시크릿 가든이 정말 국정원이냐 할 것이다. 나는 항상 생각한다. 하지만 요요마의 실크로드를 듣는다든지, 야니의 나이팅게일을 듣게 되면, 특히 요요마의 실크로드를 들으면, 남자가 소리 내어 우는 내용들이 나오는데, 마치 노래로써 위장하고, 에쓰닉 멜로디로 카무플라지한, 그것의 마음이 그렇게 슬프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한중일 합작이었다. 그러니, 일본인이, 니혼진이 그렇게 운 것일 수 있고, 우는 남자, 그리고 중국 남자, 한국 남자가 마침내 우는 것일 수 있는 것이다. 나의 서울로. 시크릿 가든은 정말, 무빙에 속한 것일까? 아니면 나의 서울에 속한 것일까? 무빙에 속한 서울 거주 서울 사람들은 당연히, 그들 재밌다는, 환장하는, 무빙에 속한다고 할 것이다. 그러나 눈물 흘릴 수는 없다. 실크로드의 에쓰닉한 전개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민속놀이를 할 때 울 수는 없는 것이다. 호랑이가 내려온다고 가랑이 춤을 출 수는 있다. 남자도, 여자도, 그리고 꼬마 여자애도 출 수 있다. 그것은 일종의 신드롬이다. 어쩌면 드론 같은 것이다. 하지만 뱅쎄 같은 아주 음질 좋은 것으로다가, 나머지 더 좋은 음질로, 비싸지만, 들을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어떤 특수 좋은 카페가 있다고 하던데, 거기서, 몇 개의 선택, 그 음반에서, 그렇다 보면, 사람들은 무빙에 사로잡혀 눈물 흘릴 수 없고, 무빙에 사로잡힐 수 없어, 드디어 눈물을 흘리는 것과 같은 의식의 좌표에 진입할 수 있는 것이다. 마치 내선일체처럼, 니혼진이 울면, 삼겹살 먹던 한국 사람도 눈물 흘리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환상인가 할 것이다.
호카손자.
호나산.
호산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