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과 죽음
사람들은 철학과에서 죽는다. 우리는 이 모든 것들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관련, 알지 못한다. 그것은 연꽃 같다. 연꽃잎이 크고 아름다워도, 사람들이 빠지면, 그냥 힘없이 사람을 물에 빠뜨리듯이, 영화는 우리를 조금 근사하게 성장시켜주지만, 미세한 무한 물질 같은 것을 주입하고, 우리가 사는 사회의 어떠한 사전적 정의도, 정치적 정의도, 그런 것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난해하고, 잘 이해가 되지 않고, 헤겔도 잘 이해가 되지 않고 그렇다 할 것이다.
미세한 무한 물질을 주입 받은 아이들은 아름답다. 일단 나이 삼십까지는 학교 교육의 씨름이, 강호동, 박광덕, 유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학교 교육을 놓지 않고 있어도 마찬가지이다. 영화가 우리에게 주입하는 미세한 무한 물질은, 어린아이들을 채찍질하면서, 우리에게 도전하여 온다.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는, 마치 일본 아이누족 같은 어감과 이름의, 작명 센스 같은........
어째서 서양의 철학 다큐멘타리는 모두 죽고, 나와 헤겔만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알 수 없는 것이다. 나의 말들은 그런 영화의 미세한 무한 물질을 대항하기 위한, 나름 미세한 무한 물질로서의 글쓰기 같은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치명적이다. 그것의 아름다움은. 아무렇게나 쓰는 글 같더니,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영화가 에드문트 훗설을 동기 삼아, 어떻게든지, 해보려고 했으나, 나와 같은 지식의 원단에는 오를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보면, 세상은 로봇 전쟁에 휩싸인 것 같은 느낌도 드는 것이다. 영화는 자기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하나 잘 만드는 것이 있으면, 엄청난 외압이 들어온다는 것. 누구도 모르는 에드문트 훗설을 배경 삼아 금자씨 영화를 만들었으나, 다른 사람들은 영화에 빠진다고는 하나, 철학적 근본 기분에 빠지는 것일 뿐, 그런 것은 철학도 아니고, 우리 옛날에 배웠던, 여자들이 어딘가에서 배웠던, 기초적인 예법도 아닌 것이다. 존만한 무빙도 마찬가지이다. 사람들은 망설이게 되는 것이다. 액션과, 효과와, 어떤 인간지정 같은 것을 보여주면, 내가 시간을 보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가? 그것은 서울의 봄 같은 것이다. 서울이 서울의 서울을 전제하고 있다면, 그 서울의 서울은 어떤 서울의 서울을 전제하고 있는 것일까? 교사가 촌지를 받을지언정, 학생들에게 이발소 머리 감기 같은 것을 시연해주는 시간 같은 것을, 그런 것을 전제하는 것인가? 그와 같은 영화적 추적은 효과적인 것이고, 매우 정확한 것이다. 그런 영화가 없고, 사실 그만한 아름다운 영화가 없는 것이다. 아름다운 영화는 안 찍는 법칙이 있는 것처럼. 교사가 촌지를 받았다. 그리고 자기 가계에 살짝 보탬을 했다. 그리고 아이들을 최선을 다해 가르친다. 촌지 받은 아이는 약간 오퍼센트, 원래 잘하는 아이에게 칭찬을 조금 더 했다. 그 아슬아슬한 서울의 봄이, 미니스커트 같은 것이, 장발 단속 같은 것이, 얼마나 우리들의 마음을 오금 저리게 했던 것인가? 그러나 배운 것도 없이, 오직 영화와 뮤직과, 일자리의 무한한 제공 같은 사회로만 전전하던 것들이, 자기 아이들이 학교를 갔다는 이유로, 그와 같은 자연 권력과 현피를 뜨는 것 같은 것은, 태피, 균피, 신피, 그러니까 우리가 잘 모르는 현상학과 깊은 관련이 있는 것이다.
어째서 옛날에는 쇼프로그램이 몇 개 없었을까? 누군가 단속을 해서 드라마 같은 것도 잘 하지 않았던 것일까? 마치 그런 것처럼, 우리는 그 몇 개를 좋아하고, 사랑하고, 외화 프로그램을, 에스에프를 좋아했던 것이다. 그 나머지, 편안함과, 넓은 하늘과, 민속 놀이와, 음식 솜씨와, 젊은 남녀의 결혼에 대한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 철학을 하면 되지 않는가?
그런데 문제는 철학은 원래 죽음과 관련이 있지, 교육과 관련이 있지 않다는데 있을 것이다.
모든 학문이 다 그렇다.
다들 죽음과 관련이 있지, 삶과 관련은 일종의 착각 같은 것이다. 우리의 모든 것이, 과거의 독재 시절에서조차, 삶과 관련을 맺었던 것도, 생각해보면, 육이오 이전의 죽음들과 관련을 맺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독일이 아무런 철학자도 배출하지 못하는 깡통국가가 된 것은, 그것의 전조가 사실 철학이 발생할 때부터 있었다. 독일. 미국. 영국. 일본. 중국. 한국. 베트남. 북조선. 그런 것들이 모두, 지능이 약한 관계로, 죽음과 관련을 맺고, 삶을 시작하고, 지금 어느 정도 진행하고 있는 것일 것이다. 약간의 저변의, 아반떼 엔의 쏘카 같은 진행을 하는, 에세이, 격렬한 필치와 피치의 내용을 적는다면, 그것이 부다페스트의 어떤 청년 같은 느낌이 있는가? 아니면 글루미 선데이, 아니면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청년 같은 느낌이 있는가? 공부하는 청년은 청신과 같다. 그리고는 아무런 내일이 기약되지 못하는 것이다. 무한한 음악을 아는 것. 그리고 무한한 철학적 공리를 아는 것. 철학자들을 아는 것. 그것들의 공통점은 절대적으로 모르는 것은, 절대적 진리 같은 것은, 다 멀리서 보면 삼각형 같은 것들인 것이다. 대체 무한한 음악을 아는 것을 어째서 사람들이, 교육적으로 허용하는지, 나로서는 잘 알 수가 없다. 그것은 다만 무한한 허용사인 것이다. 우리가 형용사를 알 때 힘을, 용사를, 얻는 느낌을 받는다. 우리 모국어도, 나중에는 기약이 없지만, 배울 때는 그렇지 않아서, 뭘 하나 배울 때마다, 김소월, 김대월, 박목월, 정철월, 그렇게 몸과 마음이 자랐던 것이다. 외국어는 그렇지 않아서, 우리가 외국어를 배울 때, 늘 커피스 온 미, 형용사나 배우려고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은 무의식적 전경은 참혹하고, 모국어의 형용사들을 배울 때 우리가 힘이 났던 것처럼, 결국 현상학적 철학의 지배에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독일 사람들은 현상학을 잘하는가? 우리가 잘하면, 형용사만 쓰지 않는 것을 볼 때, 그런 한국 사람들의 국어 사랑 캠페인 같은 것을 볼 때, 그런 독일 사람들이 자기들 현상학을 포기하고, 차라리 한국 옛날 드라마를 보면서, 사진을 연구하고, 그때 그 시절의 소설들을 연구하고, 그리고 마침내 프라하의 봄 같은 신현균의 에세이를 연구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하지만 미안하게도, 선택은 이제 죽음의 경쟁일 뿐이다. 어떤 영화의 장면처럼, 선택했더니, 더 빨라지고, 선택했더니, 그나마 조금 늦춰지는 것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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