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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민중문화이야기

양수경은 누구이고,

by 마음대로다 2023. 12. 20.

양수경은 누구이고,

시크릿 가든

그리고 앙드레 가뇽은 누구인가?

 

 

 

 
 
 
 

 

 

우리는 누구인가? 밧세바의 남편 우리아인가? 아니면 돼지우리인가? 아니면 우라노스인가?

 

우리는 유리인가?

 

유리 인간......

 

그가 지나면 아무도 볼 수 없고, 자신도 아무도 볼 수 없다. 그런 유리 인간, 우리 인간은 너무나 많다. 우리가 철학을 알고 난 뒤에, 갖게 되는 것은 슬픔 뿐이다. 고시원의 유리 화장실 같다. 그것은 조금도 설치 미술이 아니었고, 서울에서 실용적이었다. 우리는 누구도 노동자가 순수 공부하는 자에게, 먹을 것이나, 빵 같은 것을 사들고 갈 수가 없다. 노동자는 노동자의 세계가 있고, 공부하는 이는, 철학이나 인문학을 아는 이는, 그들 세계가 있기 때문이다. 책을 읽다가, 일하는 사람들을 보면, 눈을 들어, 얼굴은 그대로 둔 채, 하늘을 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딱 눈만 들고, 그렇게 보면, 어떻게 보이는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들의 철학은, 생각은, 반대는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우리가 미국을 간다고 했을 때, 그것이 일방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옛날에는 있었으나, 지금은 많이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책을 읽다가, 딱 눈만 들고, 세상을 볼 때, 그것이 일방적일 것이라는 생각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다. 어설픈 책을 읽다가, 혹은 너희들도 그렇다, 그런 시를 읽다가, 그럴 것 같은 느낌은 없다. 둘이 서로 싸우는 것을, 책을 읽다가, 딱 눈만 들고 볼 때에는,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름다운 책을 읽고, 그것에 관한 비평과, 비전 같은 것들, 비평가의 스스로 진행하는 운율이 아름다운, 표현이 너무나 문학적인 글에서는, 반대 편에서의 진입이 많이, 절대적으로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책을 읽는 사람들은, 사대주의 같은 것이 많이 없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피라미드의 부분인 것이다. 송시열이 송사리 같은 말을 했을 때도, 그것은 일종의 물결의 파문 같은 것, 어떤 태권도장의 파문 같은 것에 불과하다. 우리가 그것의 처음 만남을 잃어버리거나, 잊어버리거나 한 다음에는, 그 둘의 차이는 사라지게 된다. 신사임당이 그림을 그리고, 송시열이 뭐라고 하고, 그런 약점을 붙잡고 임진왜란이 얼마든지 발발할 것 같은 것이다. 그러나 서예를 할 때는, 세로획이 잘되지 않는 것 같아서, 해가 지도록 끙끙 앓다가, 논어 어느 내용을 적는데, 잘된 것 같을 때는, 꼭 친구가 방문하고, 겨우 소나무 송자만 그린 것 같은데, 친구가 잘 그렸다고 하고, 글씨를 잘 그렸다고 하고, 그런 황송한 나머지, 저녁에 술 먹으로 가기가 뭐한데, 그래도 마침내 작품에 대한 기쁨을 걸고, 술 마시러 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진짜 소나무가 있고, 그런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있고, 일자 획의 어떤 가지런한 진행을 마감하고, 전체를 해본 것 같은, 딱 하루, 혹은 이틀, 우리 기쁜 하룻 강아지, 바로 그와 같은 내가 있는 것이다. 네네. 치킨. 혹은 요시타카. 도대체 그것의 최진행은 무엇인 것인가?

 

우리는.

 

어떤 양희은. 그리고 해바라기 노래 중에서도, 바람 부는, 어쩌면 고개를 돌리는......

 

결국 이런 나의 말들도 유엔 안보리에 회부가 되고, 그들은 모두 답을 내리지 못해서, 비밀리에 나의 이런 것들조차, 형이상학과 같은 등급의 것이 되는 것이다.

 

엘빈 토플러의 제삼의 물결이라고 있었다. 제일의 물결. 제이의 물결. 그리고 제삼의 물결.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세로획이 어려운 우리들은, 늘 그런 구분들에 관심이 가고, 귀가 열리고, 경청을 하곤 한다. 그러나 그때부터 우리는 그런 것들이, 그다지 중요치 않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른다. 중요하다고 귀를 열고는, 중요치 않다고 귀를 닫는 것을, 우리는 무엇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엘빈 토플러의, 토플을 잘 푸는 것 같은 사람의 구분을, 우리가 좋아하는 것은, 그런 제삼의 물결이 생각보다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으로 애초에 조정되어 있는 내가 오늘 제안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그것은 일본이다. 일본의 제일의 물결. 제이의 물결. 그리고 반한감정으로서의 제삼의 물결.

 

누구도 양수경을 노래하지 못한다.

 

어떤 가수도,

 

어떤 음악가도.......

 

한번 그와 같은 관심으로 티비를 보게 되면, 영원히 그렇게 해석되는 방향이 생기게 된다. 어떤 한국식 관념주의자의 러브 노래 취향 같은 것을, 보통 사람들이 따라하는 것 같은. 그런 것은 다만 가정이나, 가설, 그러나 모든 가정은 적용은 가능하다는 원칙에 따라, 적용을 하고 나면, 그것은 믿음은 그만 실상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믿음 실상의 어려움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일본 제일의 물결에서, 일본은 초자아가 붕괴되고 말았다. 삼일운동은 우라노스 같았다. 때로는 조직된 군인들 같았다. 아니면 케이케이케이, 기호주의 운동 같았다.

 

제이의 물결에서, 그들은 절박했다.

 

자기들의 초자아가 미진하다는 것을 뒤늦게 발견하였던 것이다. 한국도 초자아가 없었다. 남궁원. 남궁진. 남궁민이 있었다. 이효석. 최만리. 박만술 등이 있었다. 설운도. 박학기. 박남정이 있었다. 이런 나의 슬픈 나열은, 나얼 같은 느낌이 있다.

 

양수경이 어떻게 돌아왔는지, 아무 생각도 나지 않는다는 말을 할 때, 나는 오토바이 여행을 처음 하고, 집에 돌아와 쉬는데, 노래를 듣고는, 눈물이 소양강 댐에서 수문을 개방한 것처럼, 쏟아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렇다면 서울은 물바다가 될 것인데......

 

전국에 있는 모든 개울들이 흘러, 방향만을 남긴 채 사라지고, 자기들의 권력으로 흘러들고, 방향들이, 때로는 택배가 갈취당하는 것처럼 갈취되고, 때로는 일년만에 도착하기도 한다는 말처럼, 그렇게 모든 개울과, 지천이, 방향만을 만들어, 마침내 오토바이 여행을 마치고 도착한 내게, 함께 도착한 느낌이었던 것이다......

 

나는 늘 미스코리아들과 살지만,

 

양수경이 속칭 리즈시절로 하고 와서는

결혼하자고 하면,

 

속으로는 더 좋아할 것 같은 어떤 불교식 대자대비 드라마를 찍는 것 같았던 것이다.

 

그것은 지식과 같고

 

그것은 사랑과 같았다......

 

그것은 땅이 되어,

겨울에는 잎이 없고,

봄에는 잎이 만개할 것 같았던 것이다.

 

누구도,

 

누구도, 다만 일본 권력으로 삼합회 넘어갔으면 넘어갔지, 일본의 제일의, 제이의, 제삼의 물결을 느낄 정도로, 외롭고, 신학적인 단일자 같고 그렇지는 못했던 것이다. 양수경도 일본으로 넘어간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그리고 이미자에게서, 도리어 한국식으로 넘어온 것 같은 느낌이 있었다. 탈북한 것 같은, 슬픈, 성공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한 보고는, 절대로 일반적이지 못하고, 다만 도로명 주소의, 한 주소 같은 느낌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화를, 일반적인 영화로도 여기지만, 어떤 한 집이 잘 사는, 한 주소의 영화로도 느끼지 않는가? 양수경이 죽어도 영생한다면, 영생여중, 영생여고, 어쩌면 영생여대 같은, 그런 것이 가능하다면, 바로 그 한 주소의 영화에 성공하여서 그런 것일 수 있다.

 

일본의 제일의 물결, 제이의 물결, 그리고 그와 같은 제삼의 물결은 우리 사는 인간의 슬픈 세상사의 전부일 수도 있다. 얼마나, 초자아가 없는 상태로, 일본은 우리에게 영향을 끼쳤는지 모른다. 그것의 조정을 어떻게 다 설명할 방법이 없다. 정말 순수한 사물로 우리에게 도착했고, 정말 순수한 사람들로 우리는 일본을, 제이의 물결을 사랑했던 것이다. 원래는 그렇지 않았을 수도 있지만, 육이오 전쟁까지 지낸 다음에는, 사람들의 문화와 철학이 갈수록 증가하였던 것이다. 사일구 의거는 그것의 슬픔의 표상의 절정이었다. 처음으로, 우리는 군인들이 죽어서, 다시 살아나, 학생이 되어, 그렇게 운동한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와 같은 원환을 우리는, 원한을, 우리는 본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다. 부산 사람들의 일본 사랑은 옛날부터 소문난 것이었다. 전두환은 일본 군가도 부르고, 프로야구 시구도 했지만, 우리는 시큰둥했다. 제이의 물결은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우리는 가난한 시골이었고, 그들은 우주로 향하는 지하철을 타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철저하게, 한국에게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않았었다. 광주 사태 이후로, 일본에서도, 어떤 주택가에서 극렬한 시위가 있었는데, 그 모습이 그렇게도, 다만 눈물들이 모여서, 그렇게 서로 싸우고, 부딪히고, 다치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제일의 물결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그런 필사의 각오 같은 것이 보였던 것이다. 세로획의 일자는 어마어마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모두, 그것을 쓸 때, 그것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한번 그것을 통과하고 나면, 소나무 그림을 그린 것 뿐인데, 시커먼, 친구가 잘 그렸다고 칭찬하고는, 술 마시러 가자고 하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진정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문열만 봐도 그렇다. 잘 만든 드라마의 원작자로서 뭔가가 있지, 실지 소설가로서는 명망이 거의 없지 않은가? 그것을 신비하게 보면 신비할 것이나, 신비하지 않고, 다만 너무 우연스럽다 하면, 또한 그렇게 보이는 것이다. 우리의 배움은, 다 배운 다음에도, 그것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알지 못한다. 고향은 아름답지만, 직장을 위해 다른 지역으로 갈 때는, 거의 모든 것이 사납게 된다. 그런 곳에서 식사 값이 비싸지 않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그리고 제이의 물결, 초자아가 없는 상태로, 경제가 황금 버블로 치닫다가, 제일의 물결, 일제의 침략으로 나아갈 것 같은 분위기가 항상 조성된다. 사람들은 힘이 없고, 그렇게 또한 조성민, 조성당한다.

 

앙드레 가뇽은 스티커와 같다. 귀여운. 어린 시절. 그래서 금세 우리가 원하는 사물에 붙고, 오래도록 친구처럼 떨어지지 않는다. 그와 같은 직접적인 능력의 표현이 실제로, 우리에게는 많지 않다. 이미자도, 제일의 스티커를 갖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가 한국의 문명화를 가져왔다는 말과, 시간적으로 같은 채널을 유지한다. 그런데 양수경의 노래를 들으면, 스티커 같은 앙드레 가뇽의 슬픈 음악처럼, 우리가 우리에게 반한감정을 일으키는 것이다. 그것은 완전한 사랑 같은 것이다. 완전한 사랑이라는 소설 제목이 있을까? 남자의 향기. 혹은 실낙원. 아직 소나무의 그림을 누군가 그리고 있지 않은 것 같은데, 다시금 남자가 늘 미스 코리아 같은 여자들만 좋아하다가, 못지 않게 꾸미고는 젊은 시절의 양수경이 찾아오는 것이다. 브라운관이 작아도, 사람들은 그 한 주소의 영화를 알아보는 것이다. 그것은 만화방 같고, 그것은 미용실 같고, 미용사가 내게 양수경을 좋아한다고 말을 하는 것과 같고, 아주대학교 앞에서, 좋아한다고, 그렇게 말하면 친구들이 막 뭐라고 한다고, 당시 한석규보다 잘생겼던 내가 웃곤 했었다. 그러니까, 형이상학자가, 형이상학은 나이와 상관 없이, 천재와 직관과 같아서, 동시에 철학적이고, 신학적이지만은 않고, 동양적인, 결국 어떤 여자인지 항상 궁금해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시험 같아서, 좌표 같아서, 시루떡을 만든 다음에, 우리가 칼로 그것을 정방향으로 자르듯이, 그런데 그것이 너무나 아름다운 것이었다. 둘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고, 그리고 조금 같고 그렇다. 양수경의 목소리에, 고향 친구, 현정의 것이, 마음이, 담기기도 했었다.

 

의무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숱한 도로명 주소는 되었던 것이다.

 

제일의 물결로 얼마든지 일본은 넘어갈 수가 있다. 도조 히데키. 나카야마 소마. 이름은 잘 모르지만, 그런 것들이, 다만 죽은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할 말이 없으면, 옛날 말을 하면서, 언어 능력을 유지 또한 고양시키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한 명

 

한 명

 

그렇게 중간적인 제이의 물결 속에서, 혼다, 소니, 내쇼날, 후지....

 

마운트 후지.....

 

 

카메라를 들고,

눈물을 흘리고

 

 

그날

반한감정으로

 

사라지는 것이다.......

 

 

양수경의 노래를 듣다가

가뇽의 음악을 들으면

 

일본에서 너무 오래 살아서

한국 말을 못하는

 

한국 사람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