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슬픈 한일가왕전: 공작새 같은 GK 350
세상에 한 명, 자동차나, 오토바이, 그런 것들로, 드라마나 영화, 형이상학적 주장을 전개하는 이가 없다. 그것은 나만의 독버섯적인 내용이며, 어느 중소기업 누군가의 말마따나, 둘이 벌어, 셋이 벌어, 한 사람이 쓰는 내용 비슷한 것이다. 우리는 씨에프 모토나, 종신, 그런 것들을 볼 때는, 중국제라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은 전통적인 것이며, 천연적인 것이다. 일종의 맥반석 같은 것이다. 아니면 게르마늄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문제는, 이름은 존테스, 그러나 발군의 디자인, 몇 개의 내용을 보자면, 우리는 혀를 기생수의 한 장면처럼 내두를 수 밖에 없다. 그것은 드룹이나, 아니면 돼지 두루치기가 될 것이다. 노동이라는 것은, 일종의 농담의 마지막 황혼 같은 것일 것이다. 쿠푸왕의 피라미드는 그것을 남기고 사라졌다. 그러니 우리는 마음이 무겁고, 이와 같은 노동절, 노농적위대, 그리고 정신절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알 수가 없다. 헤겔이 최선이고, 맑스가 최선이며, 누군가 말했던 이것이 최선입니까, 그리고 프로이트가 최선일 수가 있다. 하지만 일종의 공포영화처럼, 피라미드의 속엣 돌처럼 사라지고 만다. 그것은 오블리비온이 아니다. 오블라디 오블라다가 아니다. 오라메디. 그러나 그것은 분명 사하라 사막 같은 사라짐인 것이다. 누구도, 어떠한 한국문학도, 농담의 마지막 황혼 같은 것을 담아내지 못했다. 헤겔도 읽고, 알고, 쓸 줄 알고, 맑스도 알고, 프로이트도 알아야만 당연히, 그 최선 중의 최선이 나올 것이다. 보통의 사람들이 노동으로 사라져간다는 것. 그것은 진정 넷플릭스의 공포인 것이다. 종말의 바보가 고발하는 것이 그것일 것이다. 기독교인을 비판하면서, 정치인은 좋아한다는 것, 성경은 읽지 않으면서, 각종 관급 티비의 정치적 토론은 지켜본다는 것은 어폐가 있는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해 아래 새로운 것이 없는데, 피라미드에서 세어나오는 음향방송을, 마치 실제의 것처럼 듣고 있는, 종말의 바보들이기 때문이다. 그럴 때는 정말, 다 읽다가 만, 읽다가 포기한 옛날 철학책을 읽는 것이 낫다. 거기에는 진정 문제의 해결책을, 그리고 변증법적 지양의 내용들이 적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와 같은 근본 관심이 없이, 책을, 철학책을 읽는다는 것은, 덧없는 짓이며, 덧없는 삶의 연장과 비슷한 것이다.
돈이 백만원이 있는데
오직 돈 쓰는 데만 방법론적 연장이 닿아 있는 사람이 옆에 있다면
오전 중으로 다 쓸 수 있다.
그것은 피바다 같은 오일팔 민중 항쟁 같은 것이다.
그러나 돈이 백원 있는데,
함께 어딘가를 달린다고 하면
그것은 극락이며, 극락강이며,
영산강
그런 것이다......
우리가 맑스의 노동일을 읽는데, 그와 같은 메이데이, 노동절을 생각하고, 쿠푸왕의 피라미드를 상상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그 유명했던 한국 전공 학자마저도 어려운 일이 될 것이다. 만일 그 즉시 생각한다고 하면, 어쩔 수 없이, 불타는 토요일, 그리고 금요일, 마침내 불노동일이 될 것이다.
우리는 바둑을 두다가, 한 사람은 바둑이가 되어도, 모르는 울릉도 호박엿을 먹고,
다시 새로운 바둑을 둘 수 있다.
사랑은 늘 그런 식이다.
엘 고어로서의 HAN으로 돌아오게 한다.
숱한 이중 모음이 멈추고, 삼중 모음이 멈추고, 숱한 작곡가들의 카프리썬이 멈추고......
*
세상의 인구는, 피라미드 속으로 사라져간다. 그것의 구분은 의식과, 알 수 없음이 될 것이다.
도대체 무엇이, 리야드의 바늘귀와 같은가? 빌딩과 같은 것일까? 그럴 수 있는 것일까? 정말 피라미드 속으로 사라진 육체와, 그렇지 않은 육체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는 것일까?
*
우리가 삼국사기의 아름다운, 산에 있던, 아름다운 시멘트 건물, 버려진 도서관 같은, 그런 것을 과연, 진정 아름다운 에베소서로서 인정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다만 스쳐 지나간 왕이나 장군의, 에피소드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처럼 쉽고, 단단하게, 조금만 덧붙이면, 금세 현대적인 시멘트 건물들을 상상할 수 있는데,
사람들이 살고
그렇다면 지금의 유럽의 중세나, 현대 이전의 건물들은 어떤 것이란 것인가? 그와 같은 현대적인 건축의 흉내라는 것인가? 피라미드도 시멘트로 만든 것이 아니지 않은가? 그것의 지식의 박피와 같은 것은 심각한 수준인 것이고, 진정한 노동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유럽의 철학을 하지 못하는 것은, 그와 같은 시간 계산을 몰라서인 것이고, 그것을 그렇게 베를린에 가서, 전인화, 전도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데, 전지현과 함께 지내면서, 공부하게 되면, 당연히 그와 같은 글을 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끌어당긴다. 일종의 당김음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의 서울은 어떠한가? 서울에 집도 없고, 조계사, 절도 없던 내게,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는가? 사람들에게 어떤 것인가? 무엇보다도 플라톤이 있지 않은가? 내가 서울에 한 채 플라톤으로 만든 집이 없는 것은 매우 애석한 일이다. 내가 그와 같은 집에서 살거나, 적어도 데릴사위로 들어가 살다가, 미스코리아보다 예쁜 아내와 헤어지고, 그것은 일종의 천국을 지키기 위한 베리어 같은 것인데, 그것이 없어서 지금은 저출산인 것이고, 정말 미스코리아와 사귀는 것이다. 그와 같은 소문은 사방팔방으로 퍼진다. 평론가는 나오기가 힘이 든다. 적당한 간평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새로운 사업 계획 같은 무게와 질량, 의미와 전개 같은, 그와 같은 평론은, 피라미드의 노동일 같은 것처럼, 그것의 합성과 탄생이 도무지 쉬운 일이 아닌 것이다.
임동진을 보고, 이동진을 보자.
보지 말자.
처음에는 우리에게 힘을 주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일종의 듄 투처럼, 피라미드 안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이동진이 만일, 자동차라도 타고, 일본 여행이라도 즐겼다면, 파리 개선문의 여지와 장군이 가능하였을까?
누군가 여자 상담원에게 별표 십육만 사천점을 준 것이 있었는데, 그 말이 맞는 것이다.
노동과 이론, 작품과 비평은, 영원히 만날 수가 없는 것인 것이다. 그것은 우리를 모두, 피자로 만든다.
피자는 주자이다.
피자는 겨우, 로즈버드처럼, 필 수 있는 것이고,
바람도
담배도
부정적이긴 하지만,
일동의 노농적위대처럼
함께 있는 것이다......
기안 팔사가 존테스에서
담뱃불을 붙였던 것도 비슷한 맥락이다.
아버지가 바닷가의 어부였다가, 아들이 동경대 영문학과에 입학하는 것도 노동이다.
일본군 장교로 있다가, 이광수의 무정을 읽고, 가미가제 특공대가 되는 것도 노동이다.
중국이 공산혁명을 했던 것도 노동이고
문화 혁명도
북한이 남침을 했던 것도 나름, 자기들끼리는, 노동이었던 것이다.
노동은 육이오와 같고
노동은 사일구와 같다. 거기서부터는 한국이 독버섯적인 것이 된다. 그리고 같은 시각, 일본인 아들이 기억을 되찾아, 아버지의 묘소로 찾아가는 것도 노동이 된다.
점점 삼국사기에 접근하기 시작하고
이문열이 비슷한 맥락에서 나타나게 되었다.
국문학이 늘 막걸리나
발포맥주
수입맥주
조선맥주
그리고 카스 같은 것도 다들, 백두대간과 같은, 고급 애완견의 백두혈통 같은 것이다.
노동을 하고
우리는 죽는다.
그나마 괴물이 되지 않고......
그래서 이와 같은 종말의 날에
하늘에서 괴물이 떨어진다고 해도
그렇게 놀라서는 안 되는 것이다.......
자식의 교육을 위해, 아버지가 소를 팔았던 것도 노동이고, 아들이 그 돈으로 학교를 다니면서, 고작해야 학생 운동을 했던 것도, 어찌 보면 참 노동이었던 것이다.
우리들의 노동은 거기서 유예되었고
많은 인간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 텅빈
가난한 자취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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