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연장 탈출의 엑소더스
어떤 시간 강사가, 시간은 아니라면, 존재 강사가, 존재도 아니라면 학원 강사가, 오십억 아파트를 살더라도, 딱 두 번 행복하다고 했다. 그것은 신현균의 소재주의적 관점에서 보면, 제법 굵직한 진전이다. 그것은 그러나, 삶과 죽음 같은 젊음을 간과하고 있다. 젊음이라는 말 자체가, 삶의 리을 미음을 갖고 있고, 그리고 지읒과 이응을 갖고 있다. 너무 사소하게 나열한 것 같으나, 어쩔 수가 없다. 딱 두 번 행복할 때는, 처음 아파트를 돌아볼 때, 그리고 지급 완료 계약서를 작성할 때. 사람들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지 못한다. 공부 잘하는 사람들은, 세상이 왓 어 원더풀월드 그런 것으로만 가득하기 때문이다. 고려대가 상대적으로 그저 그렇고, 연세대가 안쪽으로만 길이 넓고, 서울대가 관악산을 바라보면, 민족의 관악산을 바라보는, 그런 것은 의미가 있다. 그들은 실제로 그와 같은 넓이로 세상을 사는 것이다. 학교 내에 이발소 숙소가 있고, 소문에는, 그의 아들이 거기서 등교했었다는 말이 있었다. 지금은 중학생이라면서 말을 나누었지만, 얼마나 번개처럼 코앞에 있는 교실에 입장했겠는가 했었다. 어쩌면 그것이 오십억 아파트였을 수 있다. 자기 자신에게는, 서푼짜리 오페라였을 것이나, 음악도 나오고, 사람들도 운집하고, 어리지만, 작고, 다른 아이들의 눈에는, 그 힘든 등교 시간을, 가볍게 패스할 수 있는, 하이패스 단말기 같은, 왜 이리 만원 이만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만원 오만원 하는지,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공간은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나는 나쁜 어린이 선생님이 있다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것은 미국 에스에프에나 나오는 것이다. 국가명, 코드명, 아르헨티나 같은. 그렇다면 어떻게 어린이들은 그 힘든, 옛날 어린이들은 그 힘든,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등교해서, 학업을 마치고,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을까? 나이가 오십이 지나니, 그런 것도 부럽고 그렇다. 조금씩 나쁜 선생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제법 비싼 아파트를, 초고속 승진을 해서, 하승진해서, 구입하면, 기분이 금방 고현정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파트를 구입해서, 그렇게 지옥 영화를 많이 본다. 기분이 고현정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은 혜자 도시락을 구입한다고 하나, 실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우리는 아주 어렸을 때, 교내 이발소에서 머리를 깎고, 그 집 아들이 저기 보이는 숙소에서 학교로 바로 등교하는 것을 상상한다. 그때를 흠모한다. 흠흠신서 같은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하다 세상이 이렇게 되었는지 진단이 되지 않는다. 탈옥 시리즈의 최신 실베스타 영화를 잠깐 보자니까, 그런 것이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미 우리는, 그 엄청난 베토벤의 클래식에서 벗어나 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의 과거로부터, 갇히게 되는 것이다. 대신에 먹을 것만 넘치게 되었다. 배고플 때도 있지만, 그 옛날 배고픔의 강도와 빈도에 비하면, 조족지혈이고, 조조관람이다 싶다. 항상 주변 사람들에게 하는 말이지만, 내용은 지금처럼 다양했지만, 항상 배가 고프고, 그랬었다. 너무 사람들이 먹을 것에 환장하고 그랬었다. 오늘은 두리안에 환장한 중국 사람의 필름을 보았지만, 신필름, 두리안 필름, 그것은 그때의 사람들이, 몇 명 아직까지 살아서, 중국에 살아서, 마음껏 욕망을 실현시키고자 한다면, 꼭 그와 같을 것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그러니, 사람들은 금세, 실은, 남욕하고 있는 것이다. 청년들은, 아직도 노량진 고시원촌에 살면서, 중고등학교를 산다고 해도, 대학교를 산다고 해도, 스즈키 어드레스는 노량진 수산시장에 있어서, 배가 고플 것이다.
금방, 돈이 생기면, 배를 채운다. 열심히 공부해서, 마음껏 원하는 것을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되야겠다는 것은, 그런 장래 희망이 과연 있을 수 있느냐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가볍게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사탄이 그와 같은 노량대첩에서 당했기 때문이다. 사무라이 참푸르를 당했기 때문이다. 분명 한국 사람들은 배고픔으로 단합되어 있었다. 그것의 겉모습 사진 같은 것은 실제의 배고픔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밥도, 김치도, 콩나물국도, 고기를 먹기 위한 중앙역 같은 것이었다. 국밥도 그렇다. 국밥도, 국을 넣은 것은, 고기만을 먹기 위한, 중앙역 같은 것이었다. 두리안으로 보자면, 국이 하나이고, 조금 있는 고기가 둘이고 그렇다. 고기만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것이, 세리안인 것이다. 샤이안. 혹은 세인트 세이야. 우리의 정신은 거기서 모두 빼앗기고 만다. 그런데 어째서, 최고급 아파트에 입성하고 나서, 기쁨이 사라질 수 있겠는가? 배고픔보다는 항상 상위 일프로를 달성하고 있지 않겠는가? 그래서 지금은, 매우, 위험한 시대인 것이다. 최고급 아파트에서 항상 공포 영화만 보고 있는 것도, 섬칫한 자동 의식인 것이다. 자동으로 열리는 것처럼. 바깥에서는 엘리베이터가. 실내에서는 텔레비전 화면이.
드라마의 인격들은, 자유롭지 않고, 과거와 단절되어 있고, 그것의 막강한 지배에 조절되어 있을 뿐이다.
모든 사람들이, 서재를 갖고, 서재필, 음악감상실을 갖고, 음재필, 서울시향. 아니면 김필, 모든 사람들이 책상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잠이 들고, 그림을 그리다가 잠이 들고, 글을 조금 쓰다가 잠이 들고, 다음 날 회사에, 연봉 삼억 버는 회사에 출근하는 것은 아니다. 일에 바쁘다가, 회사를 그만 두면, 비로소 그와 같은 서재필, 베를린, 그리고 김필을 돌아다니는 것일 수 있다. 그런 자기 자신이, 첨성대를 진행하는 수학여행자, 시간여행자라는 것을 실감할 수도 있고, 왜냐하면, 공포 영화를 보는 김대중과, 서재필로 들어가는 김대중은, 서로 대중문화적으로는 같으나, 김대중이나 김영삼적으로는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린애, 유인나, 그리고 아즈마 아키, 그런 이들의 트롯쇼였다. 그것은, 뭔가 작품적으로 똑똑하고 싶은 욕망의 공포 영화로부터, 우리를 시간적으로, 그리고 거실의 권력적으로, 탈출하게 하고,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한 것이 아니다. 서재에 서재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손을 뻗어, 거기에 닿지 못하고, 거기서 잠이 들고, 아침에 다시 연봉 오억을 버는 회사에 출근할 수 있다. 거실은 공포 영화의 지배에 놔두고, 도리어, 두리안, 해외에 가서, 옛날 시골 같은 만남이나, 컨버세이션을 나눈다. 우리는 순서에 예민해진다. 티비가 인간을 완벽하게 지배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거나, 인정하지 못한다. 마민껌도 그렇다. 우리는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스탤론의 애씀은, 한국 사람인 경우에는 해당 사항이 없다. 공포 영화의 효과와 지배, 그것들의 똑똑한 것에, 사로잡히고, 계속 그것들에게 투표하고, 사인하고 할 때는 재밌지만, 마침내 사로잡히고, 붙잡히고, 눈에 뭔가가 낀 것처럼, 그렇다고 한다면, 금세 그것은 재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탈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사탄이, 인간을 그렇게 조금씩 중앙역을 지나쳐, 조금씩 연옥에, 연잎에 가깝게 하는 것이다.
하나도 그렇지 않은 것이 없다.
누구 생각나는 목사나 신부가 있는가? 정말이지 수녀는 그런 탈옥의 연쇄가 지나면 무엇이 되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목사도 신부도 사라지고,
수녀만 남는 것인가?
땅끝 마을 여수는 그런 것을 갖고 있다.
그러니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해결 보는 포지션 플레이도 있지만, 연결의 묘수를 항상 마음에 상정하는 지혜도 있어야 한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옛날 생각밖에 없다.
나는 머리를 깎고 나오면서, 이발사의 아들을 부러워했던 것을 반성했었다.
그리고 육학년 학기 말에, 집이 전망대 아래 밤실이어서, 거기서 늘 뛰어서 삼십 분이 걸리는 학교로 등교하다가 단련된 체력을 갖고, 우리반을 교내 친선 경기의 결승에 올려놓았었다. 완전히 달려라 현균이었던 것이다.
공포의 외인 러닝 크루.......
완전한 교향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