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서 영어를 못하는 영국 사람들의 역사였을까?
그것은 스톤헨지, 사람을 슬프게 한다. 그것이 어쩌면 지금까지 내려온 것일 수 있다. 위대한 유산. 내가 마크 트웨인의 어떤 소설을 읽을 때였다. 그것이 전부 남부 방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애쓰는 모습이, 한국 학생과, 그러니까 초 에이급 영어적 진지함이 있는 학생일 것인데,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하나가 되고, 둘은 나뉘어진다. 하나는 한국 학생인 것이고, 그러니 미국 사람이 아닌 것이고, 다른 사람은 미국 사람인 것이고, 그래서 미국 사람 미국으로 우리나라 만세인 것이다. 안익태. 다행히, 숱한 악당들을 물리치고, 우리들의 로보캅은, 저녁에, 낸시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미국 남부에 살았으나, 흑인에게 잘 대했고, 자기가 당장 밭에서 일할 때, 온몸이 까맣게 타던 일을 어떤 하나님의 계시로 잘 이해하고 있었다. 솔로몬을 사랑한 여자가, 온몸이 까맸다는 성경 구절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흔적이 남는다. 그리고, 일종의 시험처럼, 서로 조건이 잘 맞았을 때만, 중국의 고속철처럼, 베이징에 하루 저녁에 도달할 수 있다. 수많은 트리뷴들. 데일리들. 타임즈들. 그렇다면 그것들은 무엇인가 할 것이다. 그것은 결국 아낙사지 유적이 된다. 멕시코까지 넘어가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지만, 그것이 그만 쉬운 일이 아니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동서남북, 상하좌우, 수직수평, 지상지하, 얼마든지 가능하다. 흑인 교회가 열정을 다해 예배를 드린다고 하는데, 그들이 싸우는 적이, 백인이 아니라는 것은 거기에 이미 증명이 되어 있다. 열정을 다해 드리지 않을 수도 있으나, 이미 봉준호, 봉착점, 미국 사람들의 남이섬에 도달하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 소설처럼, 개츠비가 거대한 높이의 서재에서, 그 책들을 모두 던질 이유가 무엇인가? 소설은 어째서, 그렇게 디에이치로렌스나, 토마스 하디를 제치고, 마침내 에이치지웰즈나, 홈즈가 달성하게 되는가? 아서 코난 도일. 뭔 이름이 전부, 내 이름을 향하는 것 같고, 에이치지는, 노골적으로, 할리 데이비슨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와 같은 문제는, 거창하다. 어딘가에서, 거창군에서, 거창하게 말하기 경연이 있다고 하는데, 부산 기장군에서는, 기장을 조절하고, 심지어는 청반바지를 바지로 만들어주는, 자동차와 오토바이도, 바느질로 수선해주는 이벤트가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진정 맞는 것이다. 이것은 아서, 저것은 코난, 그리고 이것은 도일인 것이다. 누가 영어를 못하는가? 내가 해결책을 제시한 것처럼, 사탄이 있으면, 혀가 굳고, 생각이 멈추는 현상이 발생할 수는 있으나, 그냥도 늘 사탄 같은 사람과, 조건과, 시험의 연속과 만나다 보면, 대학명, 학폭, 성폭, 소년범, 소녀범, 아저씨, 토익 시험, 간호사 지원 자격, 세브란스, 그렇다 보면, 당연히, 사탄을 만난 것처럼, 혀가 굳고, 생각이 멈추는 현상이 뒤따를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풍부한 중언부언은, 그것의 문화는, 사람들을 보존하기도 하고, 비틀즈가 처음 공연했다는 어느 술집에서처럼, 그것들의 문화를 일순간 진일보한 것으로, 뭔가 손으로 터치다운한 것 같은 기운을 선사하는 것이 있다. 그러나 노래를 부르고 나니, 중언부언이, 내가 일본 폭력물을 보지 않고, 공부만 늘 잘하니, 드디어 학폭의 이슈로 이전한 것으로 보면, 중언부언의 그 풍요한 영어 산문들이, 비틀즈의 노래들로 학폭 당한 것처럼 되는 셈이다. 사람들은 그렇다면, 셰익스피어의 연극에 갈 수 없어도, 가지 않고, 마침내 비틀즈 러셀 경의 언어 혁명의 노선에 서는 것인가? 오 나의 슬픈 영국사. 라 페레그리나치온. 그 어느 곳에도 설 수가 없다. 설수진. 혹은 설수현. 유어 마징가스티. 오직 스톤헨지만, 우뚝 서 있고, 다정하게 서 있는 것을, 노출 사진 촬영 기법으로, 그렇게 거대한 원처럼, 보이게끔 한 것이다. 우리는 맑스의 말처럼, 잃을 것이 없다. 일년 내내 논농사를 짓고, 박평식군은, 임청아 양에게 감동을 준다. 가을이 되면, 둘이 결혼을 할 것인지, 사람들은 영문학 같은 말들로써, 토마스 하디의 테스 같은 말들로써, 점을 치는 것이다. 여자가 너무 배운 것이 없다는 것이 걱정거리였다. 착하고, 바느질만 잘한다는 것이었다. 다만 그렇게만 있어도, 결국 모든 기회를 놓칠 영문학을 이길 것이었으나, 박평식 군은 이름을 전봉준으로 바꾸고는, 같은 배운 것이 없는 동학 농민군들을 마치 이성을 사랑하듯이, 사랑하다가, 형장의 이슬람교로서 사라졌던 것이다.
그것을 두고 유명한 사학자 토익비는, 역사는 도전과 응전의 연속이라고 하였다. 신채호도 비슷한 말을 하였다. 역사는 박평식과 임청아의 사랑이야기의 부산물일 뿐이다.
그런 사람이 앞으로 나타나지 않고, 늑대가 낙타 낳다고, 그런 처음 듣는 말처럼, 나타나지 않고, 영문학은 브리태니커 그런 것들이 건재하고, 허재하고, 김삼숙, 현빈하고, 그리고 사람들의 젊은 열정의 시간이나 잡아먹는 난이도가 극악한 토익 시험만, 마치 밤의 대통령처럼 우리나라를 지배한다면, 결국 성수대교의 붕괴처럼, 우리나라의 어떤 정신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을까 걱정할 수 있다.
나도 그렇다. 김옥균이나 전봉준의 머리를 갖고서나, 마치 일종 드론 실기 시험처럼, 사람들이 먹고 산다면, 차라리 우리나라가 사라지는 것도 낫지 않을까 싶다. 그러면 일본이, 대신에, 우리와 같은 정신을, 어쩔 수 없이, 가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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