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확신적 국내성
우리는 피아노 앞에서 자신할 수 없다. 그것은 흥분하며, 잦은 등고선이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새 , 그것에 대해 자신 있는 사람들이, 우리 옆에 하나둘씩 생기기 때문이다. 거리에. 가로 등불이. 하나둘씩 켜지고. 그 시의 뜻이, 문구의 뜻이, 그것을 의미했을 것이다. 그것은 모두 야살의 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여리고성이라는 말의 뜻이기도 하다. 여리고성에는 여자들이, 여고생들이 있었을 것 같으나, 비례는 제법 맞다 해도, 그것의 본질은 그것이 도리어 아닌 것이다. 남자들은 피아노를 떠날 수 있다. 그러나 여자들은, 뾰로룡, 떠날 수가 없다. 그리고 데코레이션. 치장도 하고 해야 한다. 치양마이. 사랑하는 남자가 마이를 하나 입고, 거창하게 모임에 참석하려고 하는데, 뭔가 알 수 없는 것을 덧붙여 치장해 주는 여자는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치양마이. 이 모든 것들이, 우리를 자신 없게 한다. 여자는 피아노 옆에서, 돌아오지 못하는 원귀가 된다. 남자는 피아노가 아름답다고 여기지만, 여자들은 그것이 상상을 초월한다. 나이가 헤겔책이다. 오직 나이만이, 그들을 가라앉게 하고, 차분하게 하며, 두쫀쿠하게 한다. 아무튼, 나는 피아노라는 드라마는 보지 않았으나, 안 본 것이, 본 것보다, 해변의 자갈들처럼 많으나, 이 모든 것들을 상상할 수 있는 것이다. 내용이 전혀 다른 것이라도 상관없다.
선생은 과목에 대해, 학생에게 자신이 있다. 그것은 교생이 아니라면, 누구라도 그러한 것이다. 그래서 교생은 우리들의 영원한 친구인 것이다.
문제는 피아노로부터 우리가 독립할 즈음에 발생한다. 존재는 그냥, 어떻게 하다 보니, 시내의 맛집이나, 좋은 식당들을 모두 꿰찰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문제는 얼마나, 여자들과, 혹은 여자들은 남자들과 싸우다가, 마침내 사랑하고, 때로는 배반의 장미, 사랑과 야망, 정말 말로만 듣던 재벌급 선남선녀들이 끼어드는, 그런 화려한 도시의 야경 같은 시기를 거쳐, 우리가 그래도 학생으로서 자신이 있을 수 있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부지불식중에 늘 야만을 택한다. 그것은 우리가 택하는 것이 아니다. 야만을 택하는 것이, 우리를 택하는 것이다. 어쩌면 바로 그 뜻이, 레퀴엠이라는 서양의 관념의 정확한 뜻이 아닌가 한다. 나의 이 말은, 조명탄과 같다. 구명탄과 같다. 어둠의 넓은 평원에는, 겉으로는 자신이 있지만, 속으로는 내면적 이슬람인 사람들이 많은데, 평생 레퀴엠이라는 것이 이상한 라젠카나, 블랙 사바쓰, 혹은 보니엠 정도로만 의미의 연산을 펼치다가, 나의 말에 동의의 관족이 슬쩍 나오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잘 모르는 선생을 좋아하기도 한다. 막 잘 알고, 정말 잘 알고, 말도 기가 막히게 하고, 그러는 사람보다, 시험 범위 위주로, 그것은 정확하게 챙겨주고, 은근히 놀러다니는 것을 자랑하고, 새로 산 것을 자랑하는, 그런 은평구나 도봉구, 그런 선생님들을 좋아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생을 좋아한다는 것도, 상당한 경쟁이나, 결단 같은 것을 필요로 한다. 뭔가 의미의 연산이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을 포기하고 결혼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고, 의미의 연산이 아이들을 위해 더욱 중요하다며, 결혼은 포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잘 모르는, 그러나 아름다운, 선생이 아니라, 어디 작은 인터넷 쇼핑의 모델 같은, 그런 이들을 우리가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서울에서, 그 사람에게는 아무런 죄가 없으나, 다만 우리들의 죄로 인해, 얼굴이 타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들 중에 누구 하나 자신 있거나, 자신감을 챙기는, 컨피던스, 그런 이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자의 아버지가, 중후한 마음을 가진 이면, 위로가 되고, 결혼을 준비하는 시기가 더더욱 은평구나, 도서관처럼 될 것이다. 그리고 처남이 너무나 똑똑하고, 농구도 잘한다고 하면, 그들은 모두 서울의 플라톤 드라마를 찍는, 심은하 나오고, 장동건 나오는, 그런 시간들의 주인공 같이 될 것이다. 실제 우리나라가, 그와 같은 공화국의 시절을 살았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단언컨대, 지금은 아니다. 단국대......
우리가 자신감 있는 사람들을 만나다가, 약국의 약사처럼, 의국의 의사처럼, 병국의 병사처럼, 그러다가 나와 같은 자신 없는 사람들을 유튜브에서, 혹은 지하철에서, 사당역에서 숱하게 만나다가, 델리만쥬로만 살다가, 다시금 자신 있는, 뭐든지 자신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은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국내성. 우리는 역사를 두고 자신이 있고말고가 없었다. 그러나 요사이 역사를 두고 우리가 자신감을 표하면, 점점 이상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게 되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영어가 될 것이다. 영어를 두고 모르다가, 컨피던스는커녕, 알았던 것도 까먹다가, 한국사 보고, 드라마 보고 하며, 기분만 좋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스팀이, 다른 게임 사이트 이에이와 연동되는 것과 비슷한 것이다.
복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없는 전도사를, 젊은 전도사를 지나는 것처럼 흥겨운 일이 없다. 늘 걱정이 많은 것이다. 계단에서 인사하고 서둘러 지나가는 모습이, 지금 우리들의 서울의 정확한 초상이 아닌가 한다. 복음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없는 것이 죄는 아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이 죄는 아니잖아, 그런 잠깐의 장면은 본적이 있다. 그것은 진정, 장면 정권 같았다. 옛날에는 있다라고 말하고, 있다라고 기도하면 끝이었다. 양복을 입고 있고, 늘 좋은 향기가 났다. 우리들이 만들고, 그들도 노력하는, 참다운 합스부르크 같았다. 합천 해인사 같았다. 없는 것으로 결정나고, 결판나고, 들통나고 하는 것도 전혀 중요하지 않다. 문제는 헤르쯔인 것이다. 헤르쯔는 해인사, 있다는 말이기도 하고, 르쯔, 없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헤르쯔, 그러면, 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 그런 영화가 있었다. 어떤 나를 닮은, 젊은 선생 정도 되어 보이는 사람이, 술집에서 아이에게 뭘 먹이고 있는 것이다. 주인 여사장은 내보내고자 하나, 딱한 사정을 두고 모른 척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정이 붙고,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자 하나, 나중에 알고 보니, 남자에게는 그런 아이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좀더 나중에 배우 옥소리가, 자기에게 또 한 번의 절대의 남자가 나타나면, 복음의 확신은 둘째 치고, 구원의 확신은 끝까지 의심하고자 한다는, 그런 매서운 눈빛으로 대중에게 나타났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는 이처럼, 아무런 구원의 확신이 없다. 경건하고, 거룩한, 복음의 확신은 꿈도 꿀 수 없다. 그래도 전도사 부부, 부목사 부부가 있다면, 서로의 확신들을 꺼내, 기적처럼 그것을 더욱 능숙하고 선명하게 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가 있는 것이다. 적어도 인간만큼은, 만물의 척도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사의 확신이 없는 것이 가장 슬프고, 지금 이 시간에는 가장 선명하다. 누구도 구원의 확신을 두고, 중요 일간지의 컬럼은 쓰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사의 확신이 없음을 두고는, 제법 쓸 만 하지 않나 한다.
그래서 선명함이 갈수록 증가하게 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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