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떻게 가난은 미네르바의 KF21이 되는가?
어떤 이태리 할아버지가, 미국에서, 손자가 스파게티를 한다면서, 그것을 한 번 부러뜨리는 것을 보고는, 놀라 자빠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결코 과장이, 사외이사도 아니다. 일본말로 시아와세. 무슨 말인지는 모른다. 그냥 생각이 난다. 사람들은 너무 많이 부유하면, 여자들이 옆에 너무 많으면, 공부를 못할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누군가, 실험적으로, 혹은 작위적으로, 가난해진다고 하자. 그러면, 어느 선까지는, 가난한 학생 시절이 떠오르고, 공부를 잘할 수가 있다. 그것은 여행 느낌이 그러하다. 우리가 달팽이를 갖고, 달팽이 집을 이고, 다니는 것은 아니니까. 도리어 여행지에서, 아주 비싼 호텔에서 숙박하는 경우는, 세상에서 서갑숙, 최고 갑부가 될 수 있다. 가난해지고, 가난해지면, 결국, 공부에 도움이 되었던 모든 것이 사라지고 만다. 그 말도 그렇게 정확한 것이 아니다. 결국, 사람이 가난해지게 되어서, 나타나게 되는, 어떤 쓸쓸함 같은 것. 고전주의 시대에서부터, 낭만주의 시대로, 성공적으로 진입한 것이 아니라, 다만 남의 잘 사는 로코코 시대에나 빠지는 것 같은 것. 어느 문화사회학자는, 그것이, 지독한 수사학주의라고 했다. 매너리즘. 우리는 잠깐, 그것의 어떤 언덕을 본다. 언덕의 눈 뜬 눈을 본다. 고전주의 시대에서, 낭만주의 시대로의 성공적인 진입 같은 것은 없는 것이다. 그와 비슷한 노래 가사도 있었던 것 같은데, 계속해서 기억나지 않는다. 무슨무슨 것은 없는 거야. 그것은 다만 한국의 어떤 문학적이고 미학적인 가사였을까? 아니면, 실제하는 통찰이었을까?
누가 레테의 연가 같은 것을 보는가?
연가. 그런 노래도 있었다. 계속해서 잘 생각나지 않는다. 블루라군에서, 브룩쉴즈와 남자 주인공이, 크리스마스 캐럴이 생각나지 않는 대목이 있다. 그리고 함께 난파했던 아저씨는 일찍 죽는다. 섬에는 그들만이 남는다.
성의 해방신학 같은 것도, 양날의 칼이다. 사람들이 사회생활을 하지 않고, 예술가의 방에 들어가면, 아무래도 사회적인 기초 관념조차 사라지게 되고, 거기서 제네시스, 다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자기는 원래, 회사원 깡패와 같은데, 괜히 어린 시절 공부했다는 느낌으로, 죽을 때까지 살게 된다. 우리나라 정치인들도, 국회의원들도 보면, 그런 느낌이 있다. 해방신학이, 성의 해방신학을 향해서, 하나의 우회전 잠깐 멈춤의 교통 법규를 가지듯이, 성경도 마찬가지, 사람의 기초적인 것 하나 없이, 언제든 절대적 성 같은 것으로 솟아오를, 곤두박질 칠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 세 가지. 성의 해방신학. 정치 깡패. 그리고 오직 섹스.
영화는 처음, 그렇게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는, 비누 냄새가 가득하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보지 않았다.
사람이 영화를 보다가, 잠이 드는 것은, 진정 한국어적 남녀의 성기가 완벽하게 크로스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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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하게 되어서, 다만 아름다운, 멍청하게, 그렇게만 되어도, 사람들은 괜찮다고 할 수가 있다. 이문열이 죽어서, 이상준이 되고, 김건희가 된다 해도, 그렇게 남의 존재의 심중까지 가서, 애도의 말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영화에서도, 존재는 길용우가 되고, 신성일이 되고 있다. 그렇게 나눠드는 것은, 소설가들의 재치이고, 가끔은 이처럼 실제의 분재들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집안이 아주 부자인데도, 관념을 이문열처럼 조금 가지게 되면, 존재를 나누게 되면, 그처럼 급격하게 가난해지게 된다. 이런저런 이와 같은 파상적인 공격은, 생각은, 생각보다 도움이 된다. 가난한 우리 학생들은, 재벌의 하늘 같은 재산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맨 처음의 의지를, 오직 자기만 유지할 때는 문제가 되지 않으나, 성의 해방신학이 될 수 없고, 다만 해방신학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어느 정도 자기 컬쳐, 문화를 가질 것인데, 그러나 캠퍼스의 숲을 동물처럼 지나다가, 사냥꾼의 덫에 걸리면, 발목이 끊어질 것 같은, 프레데터의 괴성 같은 것을 지르게 되는 것이다. 단 하나도, 단 하나의 영화도 보다가 잠이 들지 못한다.
그것이 시크릿 가든의 파사칼리아일 수 있다.
레테의 연가에서도, 그와 같은 과학주의적 비평 같은 것이 하나 끼어 있다. 내가 나머지를 보지 않아서, 나머지에도 그런 것이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신성일이 윤석화에게, 고등학교 교무실에서, 모델이 되어 줄 수 있느냐고 하니까, 윤석화가 자기도 선생이다고 화를 내는 장면이 있었다. 그랬더니, 다른 선생들이, 아주 입장이 곤란한 웃음을, 꿈속 같은 핀잔을, 그런 것을 짓는 것이었다. 그곳이 교무실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물론 그런 일이 하나 있다고 해서, 교무실의 존재와 사각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런 둥근 사각형이, 일종의 철학적 난제처럼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사라지고 만다.
그들은 이직에 성공한다.
내가 윤석화를 그렇게 좋아하였다. 천주교의 동상 같은 것은, 약간 무섭기도 하고, 비기독교적인 것처럼 느껴졌었다.
그런 것이 영화의 처음에는 그렇게 잘 나타나 있다.
언젠가, 이문열도 사라지고, 김경재도 사라지고, 구티 에레츠도 사라지고, 오직 성의 해방신학적 파사드 같은, 김건희만 남게 되면 어떻게 될 것인가? 파리 텍사스에서도, 김춘수와 서극이, 나의 경제 규모를 따라 하느라고, 도무지 공부를 못하는 삶을 산 것으로 되어 있다. 성의 해방신학적 파사드 같은, 어떤 미국 여자만 바라보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난다. 물론 티비에서 늘 정계 재편 정계 재편하듯이, 중국이 내 편이 될 수도 있고, 재팬이 나의 편이 될 수도 있는, 그런 가능성은 열어놓고 있다. 돈이 있으니 물감을 사고, 화구를 사듯이, 연필만 사는 사람이 되었다면, 도리어, 대학 잠깐의 공부가, 학생 시절의, 운동권의 철학 공부가, 지리산에서, 아주 투명하게 되어서, 그것의 이중섭 같은 연필과 종이로써, 비평의 요지 같은 것들을 빼곡하게 적는, 유길준의 동도서기적인 극치가, 발생할 수도 있는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참 광주사태인지도 모른다. 영화는 덮밥을 그리고 있다. 사람들은 아이들을 낳고, 세상의 덮밥처럼 살아간다. 그런데 갑자기, 대학로에서 전투기가 발생하는 것이다. 서갑숙과 윤석화가, 갑자기 로봇처럼 변해서, 한국에서 두뇌 체인지를 하는 병원을 급습해서, 병원 전체를 폭파하는 것이다. 그러나 내용을 모르는 전투 경찰들이 출동하고, 그들은 대학로 전체를 아주 피바다로 만들고 만다.
북한의 체제 선동 필름이 살짝 흐르고......
한국 군인 특공대들이 잘 싸운다는 것도 원죄가 될 수 있다. 윤석화와 서갑숙이, 아무리 로봇처럼 되었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밀리게 되고, 팔다리가 하나씩 날아가게 되었다.
그들은 놀라서, 어째서 그래도 어떤 과다출혈로 죽지 않는지, 싸우다가, 탄창은 늘 총알들로 채워지고 있었고, 팔다리를 보니,
아주 작은 사람들이, 눈에도 잘 보이지도 않는 사람들이, 아크 용접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그러다 완전히 로봇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때는
사탄의 지배를 받을 수도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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