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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언어의 의탁: 어째서 일본인들은 믿음이 없는가?

by 마음대로다 2026. 5. 10.

언어의 의탁: 어째서 일본인들은 믿음이 없는가?

 

 

 

 

 

 

 

 

 

믿고 끝도 없이, 밑도 끝도 없이, 미쯔, 마쓰다, 그런 말을 하면 일본 사람들은 마음이 많이 곤란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누군가 채근하면, 마음이 많이 곤약해질 것이다. 그와 같은 판단은, 선생보다 빠르고, 유명한 일본 출판사, 가고시마보다 힘이 있다. 국가가 있다면, 탱크도 잘 만들고, 자주포, 전투기도 잘 만들어야 하지 않는가? 선박도. 쉽도. 이런저런 배틀쉽. 일본이 최근에 그렇게 되지 못한 이유는, 한국어 믿음에 관한 침입이, 자기들이 애초에 준비해온 모든 방어진들을 무너뜨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인들은 가고시마나, 군마, 셧더베리에서 나온 책들보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를 음미하고, 잠을 자기 전에 디비디 방에서, 디비디비딥, 한국에서 배운 게임을 생각하면서, 미국 영화를 하나 보고, 그렇게 자는 것을 선호한다. 그래서 일본인들은, 집에 가는 것보다, 막차를 놓쳐, 회사원들이, 피씨방이나 디비디방에서 자는 것을, 작은 축제로 여긴다는 말이 있다. 그것은 추성춘 특파원의 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추성훈 선수의 말도 아니다. 그들의 입에는 금제가 놓여 있다. 그것은 옥편에 나오는 말이다. 나오지 않는다고, 사람들이 일거에 뒤지다가, 알아채고는 말한다 해도 상관없다. 그것은 회사에 아무런 상관이 없는, 회장 같은 말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회장 같은 말을 선호한다. 그것의 말단직원에서부터, 하츠시바, 프랑스어로 싸바싸바 하면서, 츠파시바하면서, 그렇게 일을 하다가, 문득 그 섬세한 교토의, 마치 천연 안테나 같은 목탑을 보고, 사도 바울의 편지 읽기를 성공한 경우, 마태복음의 기적도 얼마든지 개혁개방하여서 받아들이는 경우, 갑자기 동경 시내 전부가 무너질 것 같은 환상에 빠지게 된다. 그것을 입입금지, 입문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와 같은 날 것의 히카리도 아름답지 않은가? 그와 같은 고양이들의 정원은, 성숙한 여자와, 평균 크기 이상의 지성, 그것의 남자들의 울분을 사고, 슬픔, 그런 것들의 사소한, 사소리, 티비 엔터테인먼트의 질서로 나아가게 한다. 그것은 그들이 알고 싶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보편적인 것이다. 보편적인 능력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람들은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을 수가 있다. 한국어를 배울 수 있고, 일본 사람들은 얼마든지 한국어로 된 사도 바울의 편지를 읽을 수가 있다. 사도 바울의 편지를 자국어로 읽고, 눈 오는 날에, 무한한 눈 오는 날에, 가고시마에 가고, 훗카이도에 가고, 하얼빈이나, 안닝에 갈 수가 있는 것이다. 어째서 일본에는 믿음이 없는 것인가? 중국에는 그와 같은 신칸센 같은, 스트레이트성 스트레스가 없다. 사이클링 히트가 없다. 기아타이거즈의 한 회, 사이클링 홈런 같은 것이 없다. 이용규의 칠 타점이라는 것은, 거의 로즈웰의 유에프오 추락 같은 일이었다. 이용규는 다소 일본 사람처럼 생긴 구석이 있다. 너무 그렇게 생긴 사람들을, 우리가 우리더러, 일본 사람 같다고 내몰 필요는 없다. 한국 사람들이, 도리어 그런 미로에 빠져, 얼굴이 추성훈처럼, 일본 사람처럼 변할 수도 있겠기 때문이다.

 

일본어는 합씨코드 같고, 한국어는 피아노 같다. 그러나 그와 같은 분류는 온당치 않다. 한국어는 합천 해인사도 있고, 얼마든지 합씨코드 같다가, 다시금 광주, 피아노처럼 될 수가 있다. 광저우는, 조율이 필요한, 너무 이용하지 않은, 강당 구석의 존재를 모르는, 그런 오래된 피아노의 소리 같다. 그리고 어느 한국어는, 촌스러운 사투리는, 냅다 합씨코드 같은 말만 하는 것 같다. 그러다 그런 민초, 민트초코 사이에서도, 피아노 같은 것이, 연구자의 사랑과, 추구, 의지와, 어떤 리비도 같은 것으로써 포착이 되면, 그것이 아무런 이유 없이 즐거울 수 있는 것이다. 일본은 그런 것이 아예 없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마꾸또나루도라고 하면, 일단 그것이 그들에게는 편하기 때문에, 편한 것을 취사버튼 누르는 것이다. 그것이 일본인들에게는, 맥, 하는 발음에서는 일단 따라갈 수가 있다. 또 라고 하면, 일본인들은 친근감을 느낄 수 있다. 그런 또라는 발음은, 일본에는, 스포츠 또또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아주 많고, 흔하기 때문이다. 혼또. 또또. 그러나 문제는 날에서 시작된다. 나에게 갑자기, 지카라가 생기는 것이다. 지카라도, 지칼라 하면, 오히려 일본인 특유의 힘이 빠지는 것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브라질에 가서나 만날 수 있는 단어이다. 오휘이다. 우리는 날이라는 한 마디로, 그와 같은 힘을 날로 먹는 감이 없지 않아 있다. 그리고 드. 문제는 폴 드만 할 때의, 그 드 이다. 무슨무슨 드미. 드미뜨리. 그때는 드는, 다만 드일 뿐이다. 하지만, 제법 근사한 밑음을 지나고 나면, 그 드는, 그 옛날의, 초장의 드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진정, 지킬 박사와 하이드 씨라고 불러도 좋을 현상이고, 하나의 이론적 사례일 것이다. 드라는 발음을 하지 못한다. 도쿄도, 어쩌면 드쿄였을 수 있다. 그런데 일본 사람들이 드 발음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밑음만 없는 것이 아니라, 밑음이 없는 것에도, 발음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보니, 그와 같은 현상이 발생한 것이 아닌가 한다.

 

일본인들도 간장을 좋아한다. 하지만 고추장이 없는 간장은, 앙꼬 없는 찐빵 고추장일 뿐이다. 외국인들이 빵에도 고추장을 발라 먹는 것도, 우리는 잘 모르는 이유가 그처럼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마요네즈도 좋아한다. 그리고 버터도, 브레든 버터, 브래드 피트하게 좋아한다.

 

하지만 밥과 김치라고 하는 밑음 때문에, 그 모든 것들이 우리들의 취사 버튼을 누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은 밥에 의지하는가? 한국 사람들이 나폴레옹 밥이라는 신흥 오토바이 이름에서 달래 웃음, 씀바귀 웃음을 감추지 못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리고 나폴레옹 밥도, 충분히 탈만한 증후군이 될 수 있다. 탈리스만이라는 것도, 아는 한국인들이 있을 것이다. 옛날에 어떤 축구 선수가 있었다. 독일 축구 선수가, 일본으로 가서, 총리가 된 것 같은, 그런 나만의 착각이 있었다. 그러니 나폴레옹 밥이 반드시 존재의 번호조차 없는 말은 아닌 것이다.

 

일본인들은, 각기병에 걸려서도 전쟁하였다.

 

있을 수가 없는 일인 것이다.

 

못사는 한국인들은, 도리어 일장기 같은, 밥과 김치만 먹어도 힘이 나지만, 그것은 토레이의 역설 같은, 일본인들은 거의 모든 신식 무기 건물 문화를 가지고서도, 할 줄 아는 것이 침략하고, 각기병에 걸리는 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드디어 외국 음식을 먹고 나자, 힘이 나고, 눈이 떠지고 했다는 일화는, 아주 유명한 것이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나 거대한 생각 없는 브르주아의 저택에, 조선의 어떤 영험한 불상이 들어오자, 그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저녁에 잠도 편안하게 자지 못했다는 것처럼, 꿈에 나와, 돌려보내라는 말을 들은 것처럼, 그들은 애초에, 남의 나라 음식에나 의탁해야 하는, 예초기, 밑음이 없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한국을 점령해야만, 겨우 한국을 염탐할 수가 있는 불쌍한 이들이, 한일연락선을 타고 와서, 일부러 굵은 목소리를 내고, 한국인이 있는 자리에서는 더 크게 내고, 한국인이 없는 자리에서도, 행여 목소리가 들킬까 봐 내고, 겨우 돌아가서 편안한 마꾸또나루도 할 수 있다는 것은 심각한 슬픔이고, 남의 나라 걱정인 것이다. 책들이 하나도 필요 없었다. 김치나베를 먹고, 흰 쌀 밥을 먹고, 거기까지는 좋은데, 나폴레옹 밥을 먹고, 일본 농협에서 쌀을 사재기하고, 그러는 것은, 자기 존재의 믿음이, 밑음이, 개별적인 힘의 지카라가, 카라의 한승연보다도 없어서 발생하는 현상인 것이다. 그래서 일본이 한국을 자기들 총칼로 지배할 때는, 같은 밑음이 없는 사태가 발생하지 않을까 그런 관전의 포인트도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기계적인 그처럼 숨은 기독교의 정신이, 욱일기처럼 팽창하는 결과만을 가져왔다. 일년 삼백 육십 오일, 한식이 아니면 먹지 않는 일본군 장교들이 많았다. 군부대에서는 물만 마시고, 식욕이 없다고 하고, 아주 비싸고 맛있는 것이나 챙겨 먹고, 저녁에 집에 가서 먹고, 아침에 나오기 전에 먹고 하였다. 왜냐하면, 한국 점령기가 아니면, 이제는 그처럼 저렴하게, 한식을 즐길 수 없을 것이라는, 일종의 백화점 최고 고객의 마인드가 그때에도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군들 중에는, 매우 완벽한 상상력을 가진 이들이 있었는데, 아예 한국어를 일본어로 대신하는 전략까지 세우기도 했다. 그러니까 한국의 언어와 음식만 전적으로 차용한다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만일 일본이 중국의 일부를 점령하고, 이상한 알 수 없는 세계의 평화까지 맞이하면, 정말 그럴 것으로도 상당수의 고급 장교들이 여겼다는 것이다.

 

그것이 한국을 점령한 이들의 토레이, 도리에 맞다고 생각했다.

 

언어를 의탁하다 보면, 늘 그런 일들이 발생하게 된다.

 

 

피아노를 잘 치는 조센진 정도.

 

신성일 정도.....

 

 

우리가 그것을 너무 기이하고, 키사라기,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는 것도 곤란하다. 그들이라고, 자기들의 처음을 무조건 잘 알고, 초등학교를 다니고, 중등, 고등, 대학교를 다니겠는가?

 

가장 마음 아픈 것이,

 

큰 것이

 

자기들의 키가 그들이 신식 공부를 하면서 꿈꾸던 것처럼 온전하고

 

마음과 뜻이 온전하여

 

이웃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한국에 반대로 점령당해도 좋다는, 그렇게 된다면, 삼계탕을 여름에 먹다가, 테이블에 얼굴을 박고, 다시 식당 바닥에 얼굴을 박아도 좋다는

 

우리 불쌍한 아들

 

미시마 유키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