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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선양과 이론

by 마음대로다 2026. 6. 7.

선양과 이론

 

 

 

 

 

 

 

 

 

 

악은 선명하고, 노아스 알크,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중국적으로 에테르를 만드는 것도 선명하다. 소년들 중에서, 장수의 기능이 있는 것 같은 이들을 선발하고, 건강하고, 등급이 있고, 그리고 그런 기능이 없는 것들을 그런 기능이 있는 이들로 만들려는 노력도 선명하다. 그렇다면 변증법적 이론에 따라, 음양론적 이론에 따라, 무엇이 선명하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이론이 우리에게 선명하지 않다는 것일 것이다. 다만 시크릿 선샤인, 밀양, 혹은 선양만 선명할 것이다. 그것은 차라리 어둠과 같다. 아무런 문학적 이론도 없이, 다만 구도의 것들만 챙겨서, 사진을 찍는 사람의 마음은 얼마나 암실과 같은가? 아무런 도덕적, 총체적, 인간 존재의 지식 처음적인 간절함도 없이, 자기의 교과목만 가르치고, 학부모들을 악성 민원인들로만 미는, 그런 선생들도, 구석에 던져져, 마포 걸레에서 버섯이 자라는 것처럼, 실은 그들의 마음이 모두 그렇다는 것의 증거와 같은 것이다. 가장 극단적인 대사가, 먹을 수 있느냐는 폴스태프의 말 같은 것일 것이다. 물론, 그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까마귀가 옛날부터 반포조, 부모에게 효도하는 새라고 하는 것이 그렇게 가슴 아프게 한다. 새까만 새가, 그렇게 처음부터 하나였는지. 얼마나 새까만 새가 사탄의 눈에 띄어, 그것에게 효도를 가르치게 노력했을까 상상하게 된다. 그것은 코웃음도 아니고, 비웃음도 아니고, 눈웃음도 아니다. 모나리자도 아니다. 올림픽 경기가 생기자, 갑자기, 여치나 메뚜기, 그런 것들에게 관심이 생겼다. 그것도 다만, 중국 무술처럼, 취권이나, 이런저런 권, 그런 것의 흉내 같은 것이 아니다. 의학 기술이 발달하고, 뇌수술이 발달한다는 것은, 관심이 생기면, 반드시 의학적 기술과, 인간과 동물의 결합의 존재에 대한 실험으로, 콜룻세움처럼 나아가지 않을 수가 없다. 개미와 모기. 그들이 먼저 있었대도, 갑자기 개미들이 총명해지고, 모기들이 피를 빠는 것이, 천년을 넘게, 인간과 동물의 능력의 전이적인 가능성을 실험하다가 그렇게 된 것일 수 있다. 모기는 다만 특별한 수액을 빠는 곤충이었으나, 실험을 하는 세력의 관심이 오직 인간의 피 밖에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피바다, 뇌가 별로 없는 곤충은 반드시, 그리고 마침내, 뱀파이어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우리가 뱀파이어 영화를 보면서 놀라고, 모기를 보면서 놀라지 않는 것은, 우리가 퇴계 이황이나 율곡 이이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인 것이다. 우리는 놀라지 않는다. 아는 것이 많아서, 심드렁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관해서는 관계의 용기가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말을 하면 손해이고, 금방 손해보험, 화재보험 같은 것이 된다.

 

우리는 그래도 만화적으로, 그런 말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을 에포케하려고 노력하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인간이고, 인간의 태도이며, 인간의 실질일 것이다. 최종적인 인간 예수의 마음일 것이다. 악수나, 음수, 둔수 같은 것은 우리를 절망하게 하고, 생명의 의지를 꺾는다. 그나마 예수가, 우리 인간에게 무한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하고, 다만 그들도 피실험자이기 때문에, 그럴 수 없음을 우리가 잘 아는 것이다. 예수는 정보가 없다. 다만 자기가 정보가 될 수 있음을 아는 것일 것이다. 음수나 둔수, 스코투스. 그들은 인간을 죽이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실험자들의 관심이 인간을 침략하고, 동방을 정벌하는 것밖에, 즐거움의 지적인 확보가 없기 때문이다. 대놓고 둔스 스코투스라고 신학자가 있기도 했다. 우리는 그것을 차지철처럼도 알지 못하고, 김재규처럼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예수는 정보가 없다는, 피실험자의 위치에서 한 치도, 차지철, 벗어나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박정희는 피실험자였는가? 그렇다면. 그것이 우리의 가슴에, 육영수 여사의 가슴에, 총탄이 되어 날아와 꽂힌다. 남의 예수가 우리에게 정보가 없는 것이 궁금한 것이 아니라, 우리들의 인간이, 한국 사람들에게 아무런 정보도 되지 못하고, 다만 마포 걸레의, 버려진, 그런 것들에게서 자라난 버섯처럼 되는 것이 안타까운 것일 것이다. 그래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침내 하나가 되고 만다. 박정희가 피실험자를 옆에 데리고 있었다는 것은, 유명한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실험자로서, 쾌락을 느끼고 있었다기보다는, 자기가 피실험자로서 존재가 불만족스러웠다는 표현이었을 것이다.

 

제목만 놓고, 흐르는, 표본실의 청개구리.....

 

 

프로이트를 읽을 때, 기분이 좋았다. 그것은 가칠봉의 풍경처럼, 선명하고, 대치하고, 다시금 철조망으로, 일종의 노출 철조망 건축 기법처럼, 선명한 대지의 풍경이었다. 무의식과 의식 사이에, 전의식이 있다는 말도 그렇고. 무의식이 저장의 기능이 있고, 무의식 안에서 영화적인 반영이 있다는 말도 그렇다. 그러나 그것은 전부 부조리한 것만 있는 것이 아니고, 따지고 보면, 꿈의 문법을 따르고 있어서, 그것만 잘 정리하면, 프로이트는 다소 문학 창작 기법을 내세우고 있기도 하는데, 우리가 의식으로서 살아가는 세상에서도, 훌륭한 문학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랬는지는, 거기까지 말한 것인지는, 기억이 그 젊은 시절의, 지오피에서의 독서처럼, 가물가물하다.

 

그러나 금방, 이드, 자아, 초자아, 그와 같은 인간 의식의 구분으로 나아간다. 내면적 의식의 구분법이라는 것은 오래된 것이지만, 그렇게 현대적인 문법을 가진 이가, 다시 말한다는 것은 흥미로운 것이다.

 

우리들의 드라마가, 사탄의 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예수의 정보에는 영원히 이르지 못하는 것은, 이렇게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일드 히어로가 예쁜 여자 주인공을 내세워서, 한국을 문력, 혹은 영화력 침략을 했던 적이 있었다. 그곳에는 일본 특유의 이드가 없었다. 내가 혼자 살면서, 존재의 단일상태로 진입할 때, 사람들은 그와 같은 논리에 모순을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비밀의 숲과 같은 초자아로 빠지는 전략을 세웠다. 그러니까 사탄의 꿈은, 일본에 크게 있고, 한국에도 임시정부처럼 있는 것이다. 늘 있는 것 같다. 항상 있고, 단 하루를 살아도 인간답게 살고 싶다는 누군가의 말처럼, 그런 삶이 이드적으로 항상 불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그와 같은 초자아가, 일본 특유의 이드가 없는 일드 히어로적인 불만이, 자아의 이러쿵저러쿵, 표면적인 유대인적 성취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상당히 힘이 셌던 모양이다. 그래서 윤석열도 나오고, 홍라희도 나왔던 것 같다. 김재우도 나오고, 박명철도 나왔던 듯 싶다. 그리고 히어로의 남자 주인공은, 다른 데에서는 늘 자아만 넘치고, 법률적인 의지는 없고, 여자들의 안타까운 성깅적 존재의 한계 상황을 한국어적인 음량을 갖고 항상  어떻게 한다. 각종 자아적인 직장들이라는 것이, 한국에서도 미생이라는 만화와 드라마에서 잘 드러나 있다. 그런 것들은 자기들의 선한 돈 쓰는 비슷한 사람들의 서울 풍경 아래서는 힘이 있으나, 윤석열과 같은 삼드 종합의 노력의 시간 아래서는 아무런 힘이 없고, 화투짝이, 마치 동남아의 짝두짝 시장처럼 잘 맞게 되면, 금방 이드가 되고, 이상한 초자아가 되고 그렇다.

 

프로이트의 이드는, 너무나 이상한 기분을, 한낮 공부 기분을 선사하였고, 누구도 그런 말을 다시 하거나, 발전시키거나, 자기도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는, 적어도 유에프오 목격담 모임처럼, 그런 모임조차 갖지 못했다. 수잰 손택이, 비평에 반대한다는 말을 했던 것처럼, 어쩌면 이드를 보고 환장해서, 사람들이 비평에 반대했던 것이었을까? 마침내 사탄이 우리들의 문단에 등단한 느낌도 들었다. 그것은 윌리엄 조이스의 순수의 시, 경험의 시, 그런 것보다 우월한 것이었다. 이드는 같은 이드이지만, 하나는 목가적으로 순수하고, 프로이트의 이드는, 관점과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의 문예학적 유행을 잘 찾아가면, 공장에서 이노 태깅하는 느낌마저 선사한다.

 

당연히 무의식의 밴다이어그램에 이드가 포석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많은 유럽의 스마트들이, 갑자기 초자아에 이드가 포석이 되는 경우를 산출할 수 있었다. 그것은 뜻밖이었고, 믿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되었을 때, 무의식이 아닌 의식, 그것의 인격적 총체인 자아와 이드가 결합하는 것도, 도무지 문화적인 아름다움으로 그려지지가 않는 것이었다. 이드는 어디를 가도 이드이다. 어떤 아름다운 초자아의 인간이, 어디를 가도, 아름다운 초자아의 영혼을 갖는 것처럼.

 

일본 에이브이는 이드가 아니다.

 

이드의 유혹.

 

적어도 윤석열 정도는 되어야

 

비밀의 숲을 지나,

 

그와 같은 세계에 눈을 뜰 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