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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래식이야기

대학원생의 껍데기: 조선의 새 아침의 글은 영원한 일본의 에이브이인가?

by 마음대로다 2026. 7. 13.

대학원생의 껍데기: 조선의 새 아침의 글은 영원한 일본의 에이브이인가?

 

 

 

 

 

 

 

 

 

우리는 대학원생이란 무엇인가 생각할 수 있다. 젊은 예술가의 초상. 에스원 알티스트. 그것은 긴또깡 같은 것인가? 아니면 긴까꾸지 같은 것인가? 아니면, 조선의 대원군 같은 것인가? 그것들이 하나도 완전히 아니라는 것에 우리들의 걱정과 심려, 그런 것들이 있다. 대학원생은. 우리들은 학교 앞 삼십 킬로, 초등학교의 초동 수사, 그런 것만 있는 것 같으나, 대학도 있고, 대학원도 있고, 심지어는 인문대학원도 있다. 그것을 우리는 새벽닭 베드로 세 번 부인할 수가 없다. 뭔가 자기들끼리 전기 반응하고, 왕사남의 감독도, 그가 영화를 찍은 것도, 우리에게 초동 수사 삼십 킬로 금지에 관한 양심의 발로로 인해, 어느 자기들끼리 역사 프로그램 때문에, 영화 찍은 것일 수 있다. 대학원이 있다는 것, 그리고 없다는 것. 그것은 우리가 그들을 감시하고, 탐방하고, 창원대학교 탐방하고, 그래서 아는 것이 아니다. 티비를 보면, 그나마 행동 거지맵, 사람들이 편의점 도시락을 먹고, 그래서 아는 것이 아니다. 알 수가 없다. 남의 속처럼. 상젤리제처럼. 그들은 십자가를 어깨에 지고, 자기들 세미나에 참석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늘, 남들보다, 조금 앞서는 것으로, 김대중의 정치철학적 미학으로 빠지지 않겠는가? 그것의 얼굴은 친구 같고, 그것의 얼굴은 돼지고기 수육 같다. 조세희의 난쟁이가 맨발의 청춘 같은, 그런 것이 아닌 정신의 껍데기 같은 것은 가라, 그와 같은 우리들의 헌법은, 몽테스키외는, 엠씨몽, 우리들에게 덤덤한 점보 돈가스를 안겨준다. 그것을 처음 배웠을 때, 껍데기, 우리는 마음이 시원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대학원생인 것처럼, 작은 학원의 정원에서, 자부심을 갖게 하였다. 그러니까 우리에게는 늘 그런 초동 수사만 있는 것이다. 그래서 초롱이라는 영화 등장, 인물은, 그것의 이름은, 기하급수적인 슬픔과 눈물을 안겨준다. 서울은 초롱한가? 서울은 껍데기와 같은가? 장똘, 돌팍, 그것도 프랑스 사람 이름 같고, 장 껍데기, 그래도 프랑스 사람 이름 같다. 그래서 프랑스 영화 같다는 우리들의 표현에는, 어류의 껍데기 같은 어폐가 있는 것이다. 대학원생은 어폐를 집어낼 줄 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이 서울에서 대학원생을 하다 보면, 자연은 산다 처음 몇 회에서처럼, 어류의 껍데기, 생선 대가리, 그리고 그것을 개그맨 이승윤이 바라다보는, 영원한 한국 젊은이의 초상, 지리산에도 있고, 계룡산에도 있을 것 같은, 그런 것을 셀프카메라로 보는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된다. 줄여서 셀피. 그러나 물은 셀프. 물은 셀피는, 셀피를 찍고, 물을 셀프로 먹는. 지금 프랑스의 세느강 같은. 동정심 많은 한국 사람들이, 안타까움을 표시하였다. 일언이폐지. 그랬던 것이다. 수많은 알 수 없는 교향곡들. 그것들의 주제들. 우리들이 공부할 때, 포괄되었던 그 많은 것들. 중국 홍수에 감옥에서 탈출한 뱀들. 악어들. 안혜지가 춤추고 노래하고, 젊은 어린 청소년들에게 껍데기가 되지 않는 사랑이 되었던 것은, 그 시가, 몇 시 몇 분에는 마치 유에프오처럼 하늘을 나는 때가 있었다는 것을, 명자, 아끼꼬, 쏘냐, 아끼는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대학원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진정 안나까레리나이다. 토스트. 토스트예프스키. 토스트를 먹고, 톨스토이, 뭘 또 먹을 것 같은 느낌. 전쟁과 평화. 전쟁 같은 사랑. 그것의 자동차 머플러의 후적 현상 같은 느끼함은,

 

말잇못

 

 

우리는 협박 때문에 글을 못 쓰는가? 몹쓸 것들. 어떤 여자 연예인의 유튜브 몹시 티비.

 

처음에는 막연하다가, 대충 거기서 죽을 나이가 되니까, 어딘가에서 유적이 발견, 유물이 발견되었다면 얼마나 마음이 산사태가 나는 것처럼 쓸리겠는가?

 

태종은 영원한 태종이고, 세종은 영원한 세종이다.

 

혜경궁 홍 씨는, 그것의 구조주의적 발견에 눈을 뜨고는, 추사 김정희처럼, 가을 나무에서, 한밤에 떨어져 죽었을 것이다.

 

*

 

한국 사람이, 대학원의 고지전에서도 살아남아, 영문학적 문장을 갖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들이 멕시코나, 브라질, 아르헨티나로 일찌감치 축구 유학을 떠나, 영문학의 종주국, 영국을 상대로 승리하고, 월드콘을 손에 쥐는 것과 같은 것일 것이다. 오션 폴리텍도 그렇다. 이제는 그들에게 모래시계가 쥐어진 것이다. 아무리 그와 같은 작전이 빼어난들, 사일구도 있고, 오일팔도 있는 본토의 한국인들이, 홍명보호로, 한국에서 김대희로, 이런저런 일개 프로그램들이 된다는 것은, 아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베네수엘라가 삼국사기 안시성의 묘사처럼, 거대한 수학적 항력이 된다 해도, 오히려 거기에 브라질이 빨려 들어가고, 멕시코는 승리하지 못했지 않은가? 노르웨이도 패하지 않았는가? 어떤 사람은 수학적 항력을 믿는다고 했다.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그런 말을 했는지. 비행기가 날 때, 공기의 마찰과 중력과의 관계로 인해, 뒤에서 잡아당기는 힘을 말한다. 나는 거기에다 이렇게 답했다. 아무런 표시도 없으면, 도리어 항력에, 느부갓네살, 나자빠지지 않겠는가? 영어식으로 발음하면, 네부카나자르. 우리가 그 말뜻을 잘 헤아리지 못한다면, 거의 모든 외국어는, 한국어에 대한 항력 같은 것이다. 베네수엘라. 브라질, 아르헨티나.

 

싹사.....

 

 

대학원생은 장편 소설과 같다. 정말 필요 없는 말들로, 볼륨을 채울 수도 있고, 여자는 가슴이나, 남녀 모두 성기적인 뉴런이나 확장될 수 있고, 마침내 테오티후아칸에 오를 수도 있다. 터키의 어떤 곳과, 미안먀의 바간에서, 열기구를 타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늘을 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들이 아는 대학원생은 늘 스스로의 템포를 확충하지 못하고, 평범한 사람들의 밥을 탐하다가, 강아지가 되고, 쥐를 잡는 밥까지 먹다가, 주인을 향해 거품을 내고는, 죽고 만다.

 

대학원생은 실제로 그런 것을 배운다. 그런 우리들 로스구이 같은 키아로스큐로를 직접 배운다. 그러나 자기에게 그것을 대입하지 못하는, 대입 시험에서는 망치고 만다.

 

정조가 그런 숱한 세종이나, 단종, 문종들의 죽음을 두고, 세자들의 죽음을 두고, 자기는 그런 이들의 아들이라고 했던 것일 수 있다.

 

그러나 어떻게 우리가 잉글랜드 축구팀을 이길 수 있겠는가? 기아 타이거즈는 야구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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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관념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사람들을 역사라고 하는 분쇄기에 집어넣었다. 삼십 대에, 광주의 어떤 언덕을 오르고 있는데, 언덕 근처의 방앗간에서, 고추를 그렇게 맹렬하게 갈고 있었다. 김치 양념을 뽑고 있었다. 냄새가 그 일대에 가득하였다.

 

고추 먹고 맴맴이라는 것은

 

김치 먹고 맴맴이라는 뜻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조차 우리가 좋아하고, 그것을 먹고 힘을 내는 시기가 있다.

 

 

*

 

 

김 씨 성이라는 말은, 성은 김이요, 이름은 김치라는 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박김치라는 말은, 그리고 석박지라는 말은 무슨 뜻인지 궁금할 수 있다.

 

 

한반도를 대지라고 부르지 않고,

 

조선이라고 부르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